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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윤리

책임 귀속을 중심으로 한 개체론과 집단론

by urusai 2025. 1. 11.

대규모 범죄 행위나 역사적 비극에 대해 우리는 흔히 특정인을 속죄양으로 희생시킴으로써 그와 직 간접으로 연루되었던 다수의 타인들이 자신의 면책을 정당화하고 심리적 안도를 얻게 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방식의 발상은 체제의 비리 나 구조적 부조리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범죄나 비극의 보다 근 원적인 원인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대체로 전통적인 처벌 방식이기도 하며 오늘날 우리의 통념적인 책임 관념에도 쉽게 부합하는 입장으로서 문제를 미봉책으로 무 마하게 되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현행 질서 옹호적 함축을 내포하기 쉬운 입장이다.

 

이상과는 달리 대규모 범죄나 역사적 비극에 당면할 경우 특정 개인보다는 체제나 제도 자체에 전적으로 책임을 귀속시키려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이른바 구조적 부조리에 주목하는 사회윤리적 시각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은 결국 체제나 구 조의 피해자나 희생물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개인들이 져야 할 책임마저도 체제에 전가함으로 써 체제의 이름으로 개인의 책임 내지 도덕적 의무를 무시, 혹은 방기해 버리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인간이 제도의 산물이고 그 구속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제도 또한 인간에 의해 형성, 개조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입장도 재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행된 대규모 범죄나 비극적 사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는 대체로 두 가지 노선의 논변이 제시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그러한 범죄에 대해 비난받고 책임을 져야 할 특정 개인이나 개인들이 있다는 입론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고 부당하며 실제로 비난받고 책임져야 할 것은 제도라는 입론이다. 이러한 논변 은 크고 작은 각종 집단적 행위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사소한 부정이나 비리와 같은 미시적 경우로부터 우리의 현안 문제인 5공 비리나 광주 사태와 같이 거시적인 경우와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입장이 개체론적인 ( indivi dualitic ) 것이라면 두 번째 입장은 집단론적인 ( collective ) 것이 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서로 상반된 것이기는 하나 각기 그 나름의 정당근거를 지니고 있어 이론상의 논란이 그리 쉽사리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아가서 철학자가 사실문제와 관련된 이러한 사태를 판가름할 특별한 권능이 없는 이상 이 논문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는 문제의 소재를 명료히 하 고 각 입장의 몇 가지 정당근거를 확인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개체론자의 논변에 따르면 우선 그들은 개인에 의해 수행된 행 위에 대해서만 도덕적 비난이나 책임이 귀속될 수 있다고 전제하며 나아가 개인의 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집단의 행위란 없으며 설사 있다 해도 그러한 것은 도덕판단의 적합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논변의 대전제가 설사 ' 개인에 의해 수 행된 행위라는 점이 그 행위가 도덕관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충 분조건은 아니나 필요조건'이라는 보다 약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주장을 결정적으로 정당화해 줄 논거를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단지 ' 당위는 가능을 함축한다'는 도덕철 학적 논거나 도덕적 책임을 개인적 행위와 관련 지우는 것이 우리의 통념에 부합하는 까닭에 그러한 주장이 사회적으로 보다 바람 직하다는 논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고작이다. 개체론적 논변의 소전제는 ' 집단의 행위가 개인들의 행위로 환원 가능하다'는 주장으로서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인 경우들에서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일단의 학생들이 한때 흥분하여 학교 설립자의 동상을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보자. 대학 당국이 학생 개인에게 그 소행에 따라 책임을 묻는 일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집단의 도덕적 책임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책임으로 남김없이 환원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서 대학 당국이란 어떤 존재라 할 수 있는가? 대학 당국도 그 책임 유무가 그 구성원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경우는 학생 집단의 경우와 동일하게 보기 어렵다. 대학 당국은 애초에 교칙을 제정한 교수들이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구속력을 갖는 규율체계에 의해 처벌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대학 당국의 시책은 우연히 그 시책의 집행자가 된 특정 교수 개인의 의도와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정부, 군대, 대학, 회사와 같은 특정 집단의 행위와 관련해서 책임의 문제를 적절히 규정하기 위해 개체론적으로 분석되기 어려운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집단론적 입론에 주목할 여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집단적 책임에 대한 개체론 적 접근 방식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집단에 대해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일부 철학자들은 정부나 국가와 같은 특정 집단의 행위, 의도, 책임이 사적 개인들의 그것들로는 완전히 분석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 고서 이로부터 곧바로 국가와 같은 집단은 그 자체로서 신비적 존재 형태를 갖는 초월적 실재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믿음은 그릇되고 위험한 형이상학이 아닐 수 없다. 개인만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주장이 도덕형이상학적 통찰이라면 집단적 행위가 개인의 행위로 완전히 분석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철학적 사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을 수용하면서도 신비적 실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는 길을 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