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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윤리

왜 분배의 정의가 문제인가?

by urusai 2025. 1. 12.

오늘날 사회정의 ( social justice )라고 하면 바로 분배적 정의 ( distributive justice )를 의미하게 된다. 분배적 정의란 각자가 자신의 응분 ( 應分 )의 몫을 누리는 상태를 말하며 그런 사회를 정 의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의사회 ( just society )가 곧바로 이상사회 ( ideal society )인 것은 아니다. 정의란 이상사회가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란 이상사회가 만족시켜야 할 필수요건으로서 정의사회가 아니고서는 이상사회가 결코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상사회는 정의를 충족시키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이지 정의를 유린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상사회란 역사 속에서 영원히 나타나기 어려운 한갓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본다 면 우리의 현실적 관심사는 이상사회에로의 필수적인 기본 요건으로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험이 있는 곳에 용기가, 부족이 있는 곳에 절약이 미덕이 되듯이 분배적 정의 혹은 사회정의가 사회제도나 경제체제의 덕목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요구되는 일정한 사회적 여건이 전제된다. 특정한 사회적 조건이 정의를 절실히 요청하게 될 뿐 만 아니라 사회 상태가 정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갖추 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내지 사회 상태를, J. 롤즈의 용어법에 따라 정의의 여건 ( circumstances of jus tice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재화가 풍부한 세상이었던들 정의의 문 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인간들 간의 협동이 어려울 정도로 자 원이 궁핍했더라면 도덕적 덕목으로서 정의는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협동이 불필요할 정도로 풍족하거나 궁핍하지도 않은, 자 원이나 재화의 적절한 부족 상태 ( moderate scarcity )가 정의의 객관적 여건이 될 것이다. 또한 정의는 인간이 완전히 이타적인 존재도 아니고 순수히 이 기적인 존재도 아닌 여건에서 문제 되고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영원히 홉스적 자연 상태에 야수적인 존재로서 머물러 있었을 것이며 인간이 철저히 이타적 존재이기만 했어도 자신의 몫과 타인의 몫을 엄밀히 가르고자 하는 정의의 문제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제한된 이기심, 혹은 부족한 이타심 ( restricted altru ism ) 이 바로 정의의 주관적 여건이 된다 할 것이다.

 

정의의 여건을 구성하는 이러한 두 조건은 사회철학에서 흔히 흠의 조건 ( Humean condition )이라 불리는데 만일 이러한 조건이 인간 사회의 일반적 조건이라면 정의는 사회의 항구적 덕목이 될 것이며, 이러한 조건이 극복 가능한 잠정적인 것이라면 정의는 일시적이고 치료적 덕목 ( therapeutic virtue )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의의 여건에 비추어볼 때 " 능력에 따라 일하고 꿰 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는 정의를 넘어선 ( beyond justice ) 유 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분배적 정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플라톤 이래 전통 적으로 분배적 정의의 기준을 " 각자에게 그의 몫을 ( suum cuique ; to each his own )"이라는 공식으로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은 다시 각자의 응분의 몫이 무엇인가를 밝히지 않는 한 지 극히 공허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각자의 몫이 서로 다르다면 차등적인 정의관이 성립할 것이고 각자의 몫이 모 두 동일하다면 평등적 정의관이 성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 대의 대부분의 정의론자들이 합의하고 있듯이 정의는 평등을 기 본 개념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정당근거가 있는 차등 ( jutifiable inequality )을 용납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정의가 평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도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정의와 관련해서 일차적으로 중명의 부 담 ( burden of proof )을 져야 할 것은 차등의 근거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극단적인 평등주의 ( strict egalitari anism ) 도 있기는 하나 그 현실적 실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비록 실현의 제도적 장치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유와 같은 보다 귀중한 가치의 회생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모든 인간 이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입장의 난점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넘어서 극 단적인 평등은 정당화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부정 의하다는 점이 다. 사람들은 언제나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충분히 동등하 지 않으며 인간은 필요, 능력, 신체적 특성, 이해관심 ( interest )에 있어서 동일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논의의 여지를 배제하기는 어려우나 여하튼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정의관 은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정당화 가능한 차등을 용납하는 어떤 형태에 국한하고자 하며 과연 허용할 만한 차등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허용되어야 할 정당근거가 무엇인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대부분의 전통적 정의론에 있어서와 같이 각자의 응분의 몫을 결과의 정의로움 ( just result )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들이 그다지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근거를 살피고자 한다.

 

결과의 정의로움을 평가하기 위해 특정한 정형 ( pattern )을 제시하는 이론들이 나름대로의 정당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인간사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곧바로 이러한 정형적 이론이 과도한 추 상의 산물이며 인간적 정의의 다면성을 포괄하기에는 지극히 편 협한 기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노정시키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정의의 다면성을 동시에 고려, 상호 조정하고자 하는 직관주의적, 다원론적 정의론의 시도가 있기는 하나 결국 이러한 시도 역시 사회정의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가망 없는 문제라는 회의주의적 견해에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 리는 본고에서 성급한 회의주의를 잠시 보류하고 그렇다고 해서 정의의 다원적 측면을 직관에 의해 상호 조정하고자 하는 차선책에 의거하지 않고서 정의를 특정한 유형이나 결과의 속성으로 보 고자 하는 전통적 정의론자들과는 달리 정의를 과정 ( process )의 속성으로서 혹은 절차적 ( procedural )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정 의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새로운 활로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