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우리는 안분지족을 미덕으로 알았고 인간은 자신의 ' 분수 ( 分數 )'를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러 한 말들은 자신의 응분의 몫이나 분수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삶에 대한 숙명론적인 태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응분의 몫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분수를 넘지 말라고 하고 안분지족을 요구하는 것은 기존 질서 ( status quo )에 순종하라는 이야기에 불과하게 된다. 각자의 분수나 응분은 천부적인 것도 고정 불변의 것도 아니며, 설사 천부적으로 정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는 한 마찬가지 결과가 된다. 역사상 천부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대부분의 분수나 응분은 사실상 기존 질서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관명 되었다.
일반적으로 각자의 응분의 몫을 정하는 가장 손쉬운 기준으로 서 각자가 성취한 업적 ( achievements ) 을 들게 된다. 이는 각자 가 투여한 노력에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나타난 성과에 주목하는 것으로서 우선 ( 객관적인 평가와 측정이 용이하다는 실제상의 강점을 가지며 생산에의 동인 ( incentive )을 유도함으로써 사회적 유용성의 관점에서도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학교의 성적 평가를 위한 각종 시험을 위시해서 사회의 취업, 승진을 위한 대부분의 평가제돈에 다음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업적이라는 기준에 있어서도 그 양과 질의 평가에 있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며 우수한 교수와 우수한 교사, 우수한 의 사와 우수한 예술가 등으서로 다른 직종에서 산출된 업적의 질을 상호 비교하는 일 또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현재 우리 사 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소득 배분이 어떤 근거에서 응분의 몫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자못 의심스러운 노릇이다. 자유시장 의 수요공급에 의한 업적의 평가는 우선 손쉬운 것이기는 하나 아무런 제한조건도 없이 그 자체만으로 정의에 부합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업적의 구성요인을 다시 세분해 보면 그것은 능력과 노력의 공 동산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혹자는 결과로써 나타난 업적에 상 관 없이 각자의 응분의 몫은 그가 투여한 노력 ( effort )에 비례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서 노력이란 단지 노동에 소모 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노동에 투입한 정력과 열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주장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정력을 소모했다면 업적이 다르다 할지라도 응분의 몫은 동등해야 한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각자의 능력은 주어진 것이며 그야말로 자신의 것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가 쏟아 넣은 노력뿐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 즉 탈렌트 ( talent )는 하늘의 것이고 노력만이 각 자의 것이며 따라서 응분의 몫은 200 노력의 함수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5 )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도덕적 정당화에 있어 상당한 설 득력을 갖기는 하다소스러의 측정과 평가가 어렵다는 치명적인 실 제상의 난점을 갖는다. 또한 인내하고 열심히 노력하려는 경향 역시 천부적 자질 내지 타고난 능력의 측면이 있으며 6 ) 이러한 2 점 향의 계발에 있어서도 가정적,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면 노력 역시 응분의 몫을 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성취된 업적 중에는 노력과 더불어 능력 ( ability ) 도 가담해 있다.
물론 여기에서 능력이란 잠재된 가능성으로서의 능력이 아니 라 현실적으로 실현된 능력을 말하는 것이나 이러한 능력도 응분의 몫을 정하는 기준으로서는 갖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 선 능력 중에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능력도 있고 후천적으로 습득된 능력도 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 natural ) 능력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나와 상관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전적인 우연의 소산이며 운명적으로 부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덕적 개념으로서 응분의 몫에 대한 정당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연발생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이며 도덕적 당위의 차원은 그러한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사실을 인간이 처리하는 방 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정의나 부정의를 말할 수 없으며 정의 여부는 인간의 관단과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 능력 중에서 후천적으로 습득된 ( acquired ) 능력도 있는데 이는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여건의 바탕 위에 자신의 노력이 합해진 결과이다.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여건에 의존하는 한에서 그것은 당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우연적이고 자의적으로 주어진 사실에 불과하며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의의를 찾기가 어 려운 한편, 개인 자신의 노력이 가담하는 한에서는 다시 앞에서 논의된 노력이라는 기준에로 환원되고 마는 결과를 갖는다.
나아가서 선천적인 능력이건 습득된 능력이건, 능력이란 그 자체만으 로서는 응분의 몫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이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업적으로 구현된 능력이 아닌 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 한에서 능력이나 노력은 결국 업적, 혹은 공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통합됨으로써 응분의 차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할 것이다. 이상의 기준들과는 다소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 혹은 필요 ( need )가 응분의 몫을 정하는 기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서 필요라는 말이 인간이 느끼는 모든 욕구와 욕망 ( felt need )을 가리킨다면 그러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사회는 이미 정의를 초월한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필요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실질 적 욕구 ( real need )에 한정해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해야 할 권리를 지닌 존엄한 인 격이며 그런 한에서 정의는 평등주의적 측면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응분의 몫을 누릴 수 있는 적극적인 자격요건에 대한 규정 도 없이 필요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생산에의 유인이 위협받게 되며 그 결과로써 사회의 생산이 감소될 경우 상대적 빈곤 이 아닌 절대 빈곤 ( absolute poverty )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응분의 몫을 받는 데 대한 적극적 자격조건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애써 능력을 계발하고 힘써 노동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모 든 사람은 무위도식 속에서 단지 가장 필요한 자 ( the needy )가 되고자 힘쓰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게으른 자의 욕구충족을 위해 부지런한 자의 노동이 세금을 통해 강요받게 된다는 비판도 생겨나게 될 것이다. 결국 필요는 나름의 도덕적인 정당근거를 갖는 것이기는 하나 다른 고려사항과 더불어서 의미를 갖게 되는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기본적인 욕구나 필요의 충족을 위한 생활 수준의 하한선 ( social minimum ) 도 일률적으로 그어지기 어려운 것으로서 사회의 전반적인 여건의 향상에 따라 점진적인 상향 조정이 불가피한 일이니 만큼 최 저 생계비를 정하는 전략도 그 한계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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